1남 등애공 鄧哀公 조충曹沖

▲ 홍성남 칼럼니스트
조조가 총애한 아들 조충을 낳은 환부인①
 
환부인環夫人(?~?)은 조조의 첩으로서 3남을 두었다. 1남 등애공 鄧哀公 조충曹沖(195~207년)과 2남 팽성왕彭城王 조거曹據, 3남 연왕燕王 조우曹宇(196?~275년?)이다.
환부인은 일찍 죽은 조충을 생각하면 매우 슬펐다. 조조가 명석한 조충을 일찍이 세자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충은 독사에 물려 죽었다.
 
조충은 조조의 여덟째 아들로 13세의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 자는 창서倉舒 시호는 등애왕鄧哀王이다. 어렸을 때 총명하고 재치가 특출했다. 대여섯 살 때에는 지혜가 성인의 지혜와 같을 정도였다.
그는 명석한 두뇌로 두 가지 일을 해결하여 명성을 알렸다. 하나는 코끼리의 무게를 잰 일이고, 다른 하나는 쥐가 말안장을 갈아 먹어 혼이 날 우려가 있는 병사의 근심을 덜어준 것이다.
 
그 당시 오나라 손권이 커다란 코끼리를 보내왔다. 조조는 무게가 알고 싶어 신하들에게 물어봤다. 모두들 그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었는데 조충이 말했다.
“코끼리를 큰 배에 올려놓고, 물이 올라온 흔적을 칼로 그어 둔 후 같은 양의 물체를 배에 올려놓아 재어 보면 무게를 알 수 있을 것 입니다."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즉시 시험 삼아 했다.
삼국시대는 군사와 정치적인 측면에서 혼란스럽고 일이 많은 때였다. 형벌 적용에서도 매우 엄하고 가혹했다. 조조의 말안장이 창고에 있었는데, 쥐가 이를 갉아먹었다. 창고 관리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자진하여 손을 뒤로 묶어 자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면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조충이 그에게 말했다.
“3일만 기다렸다가 정오에 자수하라.”
조충은 칼로 자신의 겉옷을 찢어 쥐가 물어뜯은 것처럼 만들었다. 거짓으로 실의에 빠진 것처럼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게 했다. 조조가 그 원인을 물었다. 조충이 대답했다.
“세속에서는 쥐가 옷을 물어뜯으면 옷 주인이 불길하다고 합니다. 지금 저의 겉옷이 쥐에게 물어 뜯겼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입니다."
 
조조가 말했다.
“그것은 허튼 소리니 괴로워하지 말거라.”
잠시 후 창고 관리자가 쥐가 말안장을 갉아먹었다고 하자. 조조는 웃으며 말했다.
“내 아이의 옷이 제 곁에 있었는데도 쥐가 물어뜯었는데, 하물며 기둥에 걸려 있는 말안장임에야 말해 무엇 하겠느냐.”며 죄를 묻지 않았다.
조충은 어질고 정이 많으며 식견이 넓었다. 형벌을 받는 이들 중 억울한 자들의 사정을 헤아렸으며, 평소 충실한 관리의 실수로 인한 처벌을 관대하게 해 줄 것을 요청했으므로 조조는 그의 총명함과 인자함을 칭찬했다.
 
208년 건안 12년 13살인 조충이 병에 걸렸는데, 조조는 친히 그를 위해 기원했다. 독사에 물려 죽게 되자 조조는 조충을 살릴 수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조충이 죽자 조조는 매우 슬퍼했다. 조비가 조조를 위문할 때 조조가 말했다. 조비와 조창, 조식 등 다른 아들들에게 “그의 죽음은 나에게는 불행이나 너희들에게는 행운이다.”라며 내심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속뜻을 내비쳤다.
 
조비도 황제가 된 후에 “형인 효렴 조앙이 일찍 죽은 것은 다 자기 운수 복이었다. 만약 창서가 살아 있었더라면 나 또한 천하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조의 이 같은 말을 손성孫盛(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역사가, 무장, 정치가)은 춘추春秋의 뜻에 의하면 적자를 세울 경우에는 나이의 많음을 고려하지 현명함을 고려하지 않는다. 조충이 비록 살았더라도 적자로 세워질 수는 없는 노릇에 하물며 죽었으니 왕권 다툼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인데 그런 말을 하다니. 시경에 역무유언易無由言(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생각 없이 말하지 마라)이라고 했다. 위 무제는 말을 너무 쉽게 한 것이다.”
 
조조는 말을 하면서 얼굴 가득 눈물을 흘렸다. 또한 조충을 위해 견씨의 죽은 딸을 모셔오게 하여 합장했다. 뿐만 아니다. 조충에게 기도위의 인수를 주고 완후거의 아들 조종에게 그의 뒤를 잇도록 명령했다. 217년 건안 22년에 조종을 등후로 삼았다. 조비는 221년 황초 2년 조충에게 등애후鄧哀侯라는 시호를 주고 또 작위를 올려 시호를 공으로 추증했다. 222년 황초 3년에는 조종의 작위를 올리고 관군공으로 봉했다. 이듬해에는 을씨공으로 바꾸어 봉했다. 문제에 이어 명제도 231년 태화 5년 작위를 올려 등애왕이라 칭했다.
 
237년 경초 원년에 조종은 중상방(궁중의 칼이나 기물을 만드는 관청)에서 법으로 금하는 물품을 만들어 식읍이 300호 깎이고 작위도 도향후로 내려갔다. 그러나 229년 경초 3년에 다시 기씨공으로 임명되었다. 246년 정시(3대 조방) 7년 평양공에 봉해졌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에 부단히 식읍을 증가시켜 이전 것과 합쳐 모두 1900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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