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울의 여름>은 일단 부담없이 아늑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그러나 거슬리는 점도 드러난다

이민용 감독의 절치부심 재기작영화 <보리울의 여름>은 <개같은 날의 오후>(1995)로 한국 페미니즘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은 이민용 감독이, <인샬라>(1997)의 실패 이후 오랜 기간 절치부심 끝에 내놓은 복귀작. 공들여 만든 대작 <인샬라>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제 자리를 잡기 전 '과도기'적인 운명 탓에 실패한 영화라면, <보리울의 여름>은 이민용 감독이 자기가 가장 자신있다고 여기는 '일상적' 스타일로 복귀한 작품으로 여겨진다.축구로 하나되는 보리울 사람들<보리울의 여름>의 줄거리는 소박한 편. 시골 성당의 주임신부로 부임하는 김신부(차인표)는 보리울의 터줏대감 우남스님(박영규), 원장수녀(장미희)와 크고 작은 갈등과 소동을 겪게 된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은 축구. 보리울 마을 아이들이 막강한 실력을 뽐내는 읍내 시범학교 축구팀에 대항하기 위해 우남을 감독으로 모시고 강훈련을 거듭하자, 김신부 또한 성당에 모여 사는 고아들을 중심으로 축구팀을 결성한 것. 원장수녀는 이를 못마땅해 하지만, 축구라는 만국공통의 마법은 어두웠던 성당 아이들의 마음을 해맑게 만들어 준다.결국 김신부와 우남스님은 의기투합을 하여 보리울에 단일 축구팀을 만들게 된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물질적으로나 실력면에서 절대 우위에 있던 읍내 축구팀을 극적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 배경만큼이나 아름다운 배우들<보리울의 여름>은 시골을 배경으로 한(보길도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영화답게, 도시의 삶에서는 느끼기 힘든 자연의 풍광과 넉넉함이 가득 느껴지는 영화다. 보기만 해도 느긋해지는 경치 못지 않게, 배우들의 관록있는 연기도 영화를 편안하게 감상하게 만드는 포인트. 차인표의 경우, 그동안 '배우로서의 자질'에 대한 의심을 받아왔다. 특히 <아이언 팜>의 비평적, 상업적 실패는 차인표의 입지를 위축시켜 왔다. 아울러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등 대형 히트작을 놓친 '불운'도 치명타로 작용했다. 물론 할리우드 액션 대작 <007 어나더 데이>를 거부한 소신으로 대중들의 호감을 광범위하게 불러일으켰지만, '유명인사'가 아닌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아직 약하기만 하다. 하지만 <보리울의 여름>에서는 별다른 야심을 부리지 않고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흡수되려는 차인표의 마음가짐이 돋보인다. 전성시절 번득이던 카리스마와 남성적 매력을 한수 접어두고, 지극히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 최근 한국 영화들에서 보이는 배우들의 '과잉' 연기와는 퍽 다른 방향이다.'오버' 대신 자연스러움뭐니뭐니 해도 <보리울의 여름>의 백미는, 우남 스님을 맡은 박영규와 원장 수녀를 맡은 장미희의 '연기 대결'. 두 배우 모두 연기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 특히 박영규의 경우는 "이번에는 웃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는 말과는 달리, 여전히 웃음을 자아내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과거 박영규의 코믹 연기가 '폭발적'이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박영규의 자연스러우면서도 능란한 연기는 자연의 풍광에 파묻혀 자칫 단조로와질 수도 있었던 <보리울의 여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자연스러움'은 장미희에게도 해당되는 키워드다. <사의 찬미>를 비롯하여 그동안 장미희가 보여준 연기의 패턴은 다소 과장되어 있고 부자연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보리울의 여름>에서는 예전의 부자연스러움은 사라지고 절제된 가운데 문득문득 코믹함을 드러내는 뛰어난 연기를 보이고 있다. 배역의 캐릭터를 뛰어나게 소화한 장미희 관록 탓과 아울러, 성공적인 연출력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조연으로 대거 등장하는 김진태, 최주봉, 윤문식, 장항선 등도 자연스러우면서도 구수한 연기를 펼쳐, 영화 전체에 맛깔스러운 양념 노릇을 톡톡히 한다.바실라 수녀로 나오는 신애는 'CF 스타'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발랄하면서도 때묻지 않은 순진한 수녀 연기를 썩 잘 소화해내고 있다.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이 충분히 엿보인다. 아이들의 연기에 대한 의구심이처럼 어른들의 연기가 나무랄데 없는 수준인 반면, <보리울의 여름>의 기본 줄거리를 이끄는 아이들은 다소 억지스러운 편. 시골을 배경으로 한 영화답지 않게, 특이하게도 보리울의 아이들은 '때깔'이 곱다. <집으로...>나 <선생 김봉두>처럼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묘사되는 아이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순박하고 천진난만하다. 그러나 <보리울의 여름>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묘하게도 '도회적'인 이미지를 물씬 풍긴다. 성당 고아원의 아이들이 가난에 절은 분위기를 암시하는 정도. 보리울 아이들이 이 정도이니, 읍내 학교 축구 선수들은 거의 '강남 아이들' 수준으로 묘사된다.이것은 <보리울의 여름> 전체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요소다. 즉 아이들이 유난히 중산층적으로 그려진 이유가 연출의 실패 탓인지, 아니면 일부로 의도된 것인지.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전반적으로 꽤 어설픈 것으로 보아, 이민용 감독의 연기 지도가 아이들에게까지 효과적으로 전달된 것 같지는 않다. 아니면 이민용 감독이 <집으로...>나 <선생 김봉두>에서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두드러진 '도시 대 시골의 대비'를 부수고 싶은 결심을 하게되었는지도 모른다. 즉 시골의 아이들도 서울 아이들 못지않게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산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는 것. '도시 대 시골'의 대비가 무너진 영화 때문에 <보리울의 여름>을 보면서 받게되는 느낌은 조금 묘하다. 분명히 도시와는 여러모로 대조되는 시골의 순박함을 보이는 '착한 영화'를 기대했는데, 영화의 대부분은 가톨릭과 불교의 차이와 화합을 다루던지, 아니면 축구를 통해 '승부'의 세계를 펼치는 등, '도시 영화'와 별로 다르지 않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민용 감독의 말을 들어보니 "천주교와 불교, 집 있는 아이들과 고아들, 보수와 진보의 만남과 대립을 통해 화합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란다. 보리울이라는 한정된 공간에만 머무르기에는 상당히 거창한 의도다. 하긴, "그러나 <보리울의 여름>은 근본적으로 아이들의 꿈을 키우자는 주장을 담은 영화다"라는 남은 말을 들어보니, 주제 의식만큼은 시골 풍경에 어울리게 소박하고 다소 촌스럽기까지 보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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